What Makes Art Art?

 


이여운/ 큐레이터

 

박보나의 작업은 불친절한 매력이 있다. 시각적으로 흥미롭거나 자극적이어서 관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아니라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떻게 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다가가게 한다. '불친절'하게도 그녀는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을 명명백백하게 제시하지도 않고 딱히 그 방법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고 한다. 그냥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보세요' 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종종 무성의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보나는 왜 관객이 자칫하면 쉽게 지나쳐 버릴만한 위험한 방법을 택했을까?

눈으로만 보는 작품일색의 요즘 미술계에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보기'가 아닌 예술 작품을 어떻게, 혹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각 요소를 최소화 함으로 관객이 그들의 행동, 전시장, 더 나아가 제도적 틀과 같은 다양한 레이어의 컨텍스트를 경험하게 한다. 즉 어떤 컨텍스트 안에서 예술 작품이 생산되며 그 생산물을 예술 작품으로 유지하는 제도적 장치는 무엇인가를 관객 스스로 반추하게 한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그 누구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what makes art art?' 에 대한 해답을 관객 스스로 찾게 하는 아주 영리한 방법이다. 수수께끼를 던져놓고 답은 알아서 찾으란다. 그렇다면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혹시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닐까?

"나는. 너의. 60년대식. 개념이. 싫었어. 너의. 그. 70년대. 풍의. 미니멀한. 스타일도. 지겨웠구. 그냥. 다. 지겨웠다구. 뭐랄까. 니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내가. 다. 어디서. 본. 듯한. 것들. 같았다고나. 할까? 난. 너의. 독창성이. 결여된. 진부함에. 진절머리가. 났었다구! 너한테는. 재미있는. 상상력이나. 흥분되는. 반전같은. 것.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어!”
– 박보나, [X], 2007 중에서

박보나의 X 시리즈 중 첫 번째 버전 <<X>> 에는 그녀의 작품관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미스터리한 주인공 X를 3년 전 아무 이유 없이 '뻥'하고 차버린 남자친구가 어느 날 문득 다시 나타나 헤어진 이유를 묻는 X 에게 하는 말이다. 그냥 싫단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단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분초 단위로 기술이 개발되고 세계가 변하는 21세기에 반세기 전의 예술사조를 답습하는 것은 매우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다. 그럼 그녀가 하고 싶은 21세기 예술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대단한' 예술작품을 볼 기대에 부풀어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전시된 작품을 훑어본 후 돌아서서 자신의 문화생활에 만족하며 전시장을 떠난다. 하지만 방금 보고 나온 작품이 미술관 안전을 위해 설치된 소화기 혹은 작품보존을 위해 설치해 놓은 습도계였다면?

What: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입장료를 내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무엇인가를 보고 나온다. 하지만 박보나의 전시에서 관객이 예술이라고 믿고 보는 것은, 예를 들어 망원경이나 과자 더미들은 사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은 캔버스와 붓이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 오브제가 아니라 작품을 완성 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미술관에 온 관객의 모든 행동과 상황이 합쳐져 그 자체가 '예술작품' 이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모든 것이 당신도 모르게 예술 작품이 되었다면?

박보나는 시츄에이션 메이커(Situation Maker) 이다. 그녀가 생산 하는 것은 물질적 오브제가 아닌 말 그대로 '상황' 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당신(관객)이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그녀의 작품이 완성된다. 그 행위에는 제한이 없으며 작가는 어떠한 방향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 당신이 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 일부라는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2007년 작품 <<Deja vu (Buy 1 Get 1 Free)>> 는 작가가 다과를 준비해야만 했던 세미나 장소 안에 설치한 작품으로 외부에서 타자에 의해 주어진 ‘상황’ 에 작가 자신이 개입하여 또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해 작가는 Buy 1 Get 1 Free 스낵을 구입해 전시장 안쪽과 바깥쪽에 똑같이 준비하고 관객이 원하는 쪽의 스낵을 먹도록 했다. 이 작품 안에서 관객은 작가가 준비한 다과를 먹는 소비자인 동시에 그녀의 작품을 완성하는 행위자, 즉 주체자가 되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작품 감상과 창작이라는 두 개의 컨텍스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상황에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관객을 통해 작가의 창작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난다.

Where: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관객은 왜 그 소화기와 습도계를 예술 작품으로 착각했을까? 집집에 설치된 소화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무겁고 지겨운 질문은 마르셀 뒤샹의 '샘' 이후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 시리즈 같은 작품들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미술관 안에 설치된 사탕 더미가 예술 작품이라면 미술관 앞 슈퍼에서 파는 사탕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박보나는 전형적인 예술작품의 주제나 미디엄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보이게 하는 물리적 공간 자체도 부정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작품들은 여전히 그 제도적 공간, 즉 미술관이나 갤러리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부정하려는 그 공간을 재치 있게 이용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풍자하는 작가의 재기가 담겨있다. 특히 2004년 제작된 버려진 화분을 이용한 시리즈 <<Rediscovering Flowerpots>> 가 그렇다. 작가의 말대로 버려진 화분들은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작가는 화분들을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직접 전시장 안으로 가져오기도 해서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던 이 화분들이 어디에 놓이는가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변모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4번째 화분 작품에서 화분은 여전히 전시장 밖 마당에 있다. 이 화분은 전시장 안에서 그 화분의 아웃라인을 유리창에 테이프로 붙이는 행위를 통해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관객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을 경험하고 오브제 화분이 아닌 그것이 놓인 환경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브제를 전시장 밖에 설치 했다는 점에서 1970년 대니얼 뷰렌의 테이핑 작업 <<Watch the Doors Please!>> 와 유사하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관객은 미술관 안에서 작가가 설치해 놓은 망원경을 통해 미술관 옆을 지나가는 지하철 문을 본다. 그 문에는 지하철 이용객들에게는 자칫하면 광고나 그랲티 아티스트들의 장난으로 보일 수 도 있는 전형적인 대니얼 뷰렌의 색색의 스트라이프가 테이핑 되어 있다. 이 단순한 스트라이프들은 미술관 안에 있는 관객들에게는 그들이 위치한 장소의 특성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 인식된다. 이 두 경우에 박보나와 데니얼 뷰렌 모두 어떤 가공하지 않은 것(raw material) 으로부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들은 관람자의 위치 변화에 따른 즉, 그 장소의 아이덴티티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물질적인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이 서 있는 컨텍스트를 인식하게 된다.

When: 당신은 왜 지금 그것을 그곳에서 하고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미술관까지 가서 예술을 감상하는 것일까? 글로벌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은 구글과 손잡고 거장들의 작품을 픽셀 단위까지 볼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입장료를 내고 마치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를 경험하겠다는 듯 미술관을 방문한다.

박보나의 작품은 지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다. 그녀의 많은 작품은 특정한 상황에 맞게 제작된 일회성의 작품이 많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서 감상하지 않으면 똑같은 작품을 다시 볼 기회는 사라지게 된다. 많은 예술작품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하는데 반해 박보나의 작품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녀의 또 다른 시리즈 작품 X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작가가 쓴 소설을 전시공간에서 재현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 버전인 <<X2>>는 그 본래 전시장소인 토탈 미술관과 가나 아트 센터에 관한 이야기로 두 번째 버전인 <<XX>>에 나오는 벰핌락 에서는 전시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전시 기간이 지나면 작품은 사라지게 되고 도큐멘테이션만 남게 된다. 관객이 지금 감상한 작품이 내일이면 사라져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전시하지 않는 한 존재 하지 않게 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또 한번 전형적인 전시 개념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컨텍스트를 빼놓고 작품을 감상할 수 없다. 그 컨텍스트가 실제 물리적 공간이던 공간의 아이덴티티 같은 개념적 컨텍스트이건 작품은 항상 컨텍스트를 가지기 마련이다. 70년대 Chinati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과 컨텍스트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한 도날드 져드가 말했듯이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그 컨텍스트를 고려하고 생산해야 하며 그래야만 완벽한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 이는 작품 감상이 이제는 더는 눈으로만 보는 단계를 뛰어넘어 작품을 둘러싼 모든 컨텍스트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어진 상황에 맞게 작품을 생산해 내는 박보나는 어쩌면 작품과 컨텍스트를 모두 고려한 진정 '친절한'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박보나는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모든 제도적 틀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한다. 때로는 그 행위가 매우 미묘해서 알아채기 힘들 때도 있지만 일단 한번 작가의 의도를 알고 나면 그 수많은 층위에 있는 수수께끼들을 풀어내 가는 재미가 꽤 있다. 쉬운 눈요기 작품만을 찾아다니는 딜레탕트들은 그녀의 작품이 불친절하다며 불평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한 예술인지 아닌지도 모를 무언가를 지금 전시장 안에서 보는 것은 매우 값어치 있는 불편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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