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오프닝

 

 

문혜진(미술이론/미술비평)

 

제대로 된 오브제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프닝 행사용 김밥이 놓여 있는 테이블 하나와 벽에 걸린 수건 열 장, 휑한 공간 가운데 덜렁 놓여있는 단(段) 형태의 구조물뿐. 곧이어 형광등이 그대로 노출된 조야한 런웨이에서는 패션쇼가 벌어진다. 붉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김밥 마는 장갑을 낀 여성, 파를 담은 시장바구니를 매고 썬 캡을 쓴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성, 겹쳐 쓴 모자에 작업복 조끼를 입은 채 손걸레를 든 남성. 3명의 여성과 2명의 남성으로 이루어진 모델 5인은 무표정하게 단 위를 두 번씩 왕복한 후 사라진다.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 김밥을 주워 먹으며 무심히 테이블 위에 놓인 책자를 펄렁펄렁 넘기다가 깨닫는다. 지금 씹어 삼키고 있는 김밥이 보통 김밥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상 전시의 주인공은 바로 이 평범하지만 속이 꽉 찬 김밥과 그것이 놓인 테이블과 그 위에 곱게 펼쳐진 꽃분홍색 테이블보였던 것이다.


일상적이고 허름한 재료로 주어진 상황에 슬쩍 끼어들어 맥락을 바꾸거나 모순을 드러내는 상황 개입적 작업을 하는 작가 박보나는 이번 개인전 ≪FREE Flight≫에서 전시 오프닝이라는 관례적 행사를 작업 대상으로 선택했다. 일 년에 수백 개는 족히 열리는 미술 전시에서 오프닝은 작가에게는 그간의 노작을 최대한 완벽한 모습으로 선보이는 자리이고,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에게는 전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작품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홍보와 거래의 장이며,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정보를 교환하고 인맥을 다지는 거대한 사교의 현장이다. 이 진지하고 우아한 친교의 자리에 다과는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로 행사가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박보나가 흥미를 느낀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행사의 원활한 실행에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언제나 부차적인 취급을 받던 오프닝용 다과 및 집기 그리고 그 제작자를 무대의 중앙으로 끌어내 언제나 숨겨져 있던 이들의 존재를 한번쯤 가시화하고자 한 것이다.


전시의 이면에서 제도의 실행을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를 드러낸다는 목적을 위해 박보나가 선택한 전략은 (작가의) 익명화와 그에 대응하는 (제작자의) 명명이다. 소외되던 대상을 수면으로 끌어올릴 때 흔히 취하기 쉬운 방법은 인간적인 시선으로 대상에 밀착해 해당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이들이 엄연히 실존한다는 것을 강조하거나, 비가시적인 대상을 가시화할 때 작가가 일종의 배우로서 중심에 나서는 것이다. 전자는 믹스 라이스의 작업처럼 사회비판적이고 직설적인 발언을 하는 마이너리티 미술에서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관객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인터랙티브 퍼포먼스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인데, 박보나의 전략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일종의 판을 마련해주고 자신은 슬쩍 빠지는 것으로, 여기서 작가나 대상은 직접 목소리를 드높이거나 자신의 물적 현존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다. 기존 전시의 관행이 슬며시 뒤집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김밥을 먹으며 책자를 넘기다가 옆에 놓인 의례적 보조물이 실상 작품이었다는 것을 퍼뜩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오프닝에 놓인 김밥과 테이블보, 테이블은 표면적 대리물에 불과하다. 작품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집기나 김밥이 아니라 이를 제작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작가와 제작자가 공유한 접촉, 즉 관계 맺음이다. 전시의 도록이자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영구적인 물품인 책자는 이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사진 다큐멘터리로, 작가가 김밥, 테이블보, 테이블의 생산자들을 섭외하고, 이를 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김밥 제작자 이길희님과 테이블보 제작자 양기상님, 테이블 제작자 김만호님은 주문받은 물품을 만들며 작가 박보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가게가 위치한 동네의 내력과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헤쳐 온 장인들의 개인사가 흘러나오면서 특정 시공간이 고스란히 품고 있는 지역성 및 한 개인으로서 제작자의 존재가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청와대 근처라 경호대 사람들이 자주 들른다는 고가네 김밥, 한남동에 자리 잡은 터라 들고 나는 외국인들을 지켜본 LA타운 양복점, 한옥보존구역의 특수성의 수혜와 폐해를 증언하는 누하 목재의 역사는 전시라는 제도 바깥에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을 전시의 중심에 배치한 것으로, 통상적 전시 주체를 전치시킨 것이다.


기존의 전시 관행의 위계를 역전시키는 행위는 60년대 말 제도 비판 작업들을 위시하여 미술사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온 방식이다. 하지만 박보나의 실천에서 특기할 점은 미술계 내부의 이데올로기나 역학 관계를 넘어서 전시라는 제도 범주에서 잊혀진 하부 구조의 존재를 돌아봤다는 것이다. 음식이라는 동일한 재료를 등장시키며 오프닝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외형적으로 유사점을 공유하는 태국 작가 리크릿 티라바니야(Rikrit Tiravanija)와 박보나를 비교하면 차이점은 뚜렷해진다. 1992년 303 갤러리에서의 유명한 퍼포먼스에서 티라바니야는 화이트 큐브라는 전시공간의 배타적 지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창고와 사무실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화랑으로 끄집어냈다. 전시장에 끌려 나온 사무집기 때문에 디렉터는 관객 앞에서 일해야 했으며, 작가는 창고에서 꺼내 온 요리 도구들로 카레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나눠 주었다. 여기서 티라바니야는 전시장과 이를 보조하는 공간(사무실, 창고)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영구적 오브제로서 작품을 매매하는 전시의 상업적 속성을 친교와 화합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라바니야의 작업은 전시와 미술계라는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 그가 뒤바꾼 공간은 작품의 전시 및 판매를 지원하는 갤러리 내부의 구조이고, 그가 뒤집은 기능은 작품을 감상 및 거래하는 관람자, 중개인, 갤러리의 관습적 역할로 역시 전시 내부의 전형적인 자리매김에 대한 것이다. 반면 박보나가 끌고 들어온 것은 미술계 담론 내에서 중심과 주변의 자리바꿈이 아닌, 아예 해당 제도 내부로 들어오지도 못하던 이름 없는 대상들이다. 다시 말해 고급미술/저급미술, 메인/서브라는 위계 설정의 대상에도 속하지 못하고 존재가 지워진 채 전시라는 상부구조를 묵묵히 받쳐 온 비미술적 물적 토대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주변 중에서도 주변인 대상을 가시화한 것이다.


대상 설정 외에도 세부 전략에서 박보나 특유의 태도는 두드러진다. 요리와 대화를 주도하며 하나의 쇼로서 퍼포먼스를 지휘하던 티라바니야와는 달리 박보나는 상황을 마련하는 것 외에는 개입을 최소화한다. 작가의 존재는 책자에서 제작자의 대답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될 뿐이며(책자는 대화 내용 중 장인들의 답변만 싣고 있다), 결과물인 집기나 오프닝의 패션쇼에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슬쩍 끼워 넣고 어깨 너머로 경과를 구경하는 듯한 약간의 장난끼와 익명적인 개입 방식은 박보나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일관적인 태도인데, 역시 전시 오프닝을 주제로 했던 전작 <봉지 속 상자>(2010)는 이번 전시와 여러모로 공유 지점이 있다. 한 전시의 오프닝에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의 취향을 조사한 후 이를 반영해 작가가 장을 보고, 저마다의 저녁거리가 담긴 노란색 E-Mart 비닐봉지를 관객들 각자에게 들려주는 이 이벤트에서, 작가인 박보나의 존재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차별화된 쇼핑 목록 안에서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작품들로 완성된 전시 사이에 슬쩍 끼어드는 일종의 기생 전략은 소위 날로 먹는 듯한 가벼운 개입을 지향하는 박보나의 독특한 성향으로, ≪FREE Flight≫의 경우 작가의 질문이 모두 지워진 책자와 작가 대신 전시의 주체가 된 장인들로 표현된 셈이다.


한편 ≪FREE Flight≫ 오프닝 행사의 다른 축을 담당했던 패션쇼는 책자 프로젝트와는 조금 성격을 달리한다. 패션쇼는 오프닝이 열리는 플랫폼 플레이스 629라는 특정 장소의 성격을 염두에 둔 장소 특정적인 작업으로, 압구정 도산공원이라는 소비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한 플랫폼 플레이스의 성격을 반대로 비튼 것이다. 실제로 전시가 열리는 공간의 아래층에는 수입 브랜드 멀티샵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박보나는 소비문화의 상징인 패션쇼를 역으로 뒤집는 반-패션쇼(anti-fashion show)를 컬렉트 샵 바로 위에서 연다. 자기 과시욕과 소유욕이 넘실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번쩍이는 표면은 박보나의 반-패션쇼에서 김밥 마는 장갑과 검정 비닐봉지, 시장바구니와 작업복으로 대체된다. 흔하고 허름한 일상적인 사물의 선택은 고급 옷가게라는 해당 장소에 대한 언급일 뿐 아니라 고급 상품을 판다는 점에서 본질상 다르지 않은 갤러리라는 미술 제도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패션쇼 퍼포먼스는 제도 비판적 개입인 앞서의 김밥·테이블보·테이블 작업과 겹쳐지는데, 모델들의 복식이 김밥 마는 아주머니, 재단사, 목수의 작업복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중첩은 한층 가중된다.


다시 김밥·테이블보·테이블 프로젝트로 돌아가자. 과정 지향적인 이 작업은 일회성 퍼포먼스라기보다 축적으로서의 기록에 가깝다. 작가와 오프닝 소품 제작자가 공유한 시간은 전혀 다른 맥락의 두 사람이 만나 이루어낸 둘만의 관계 맺기의 흔적이자, 제작자의 사적 역사가 전시라는 공적 영역과 마주치는 교차 지점이다. 이 점에서도 박보나의 작업은 티라바니야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 티라바니야의 작업 역시 요리를 나눠먹으며 관객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지만, 오프닝에 참석한 불특정 관객들과 즉흥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이기 쉽다. 오프닝 용품의 제작자를 직접 섭외하고 그들을 설득해 책에 출연하도록 만든 박보나의 작업은 대상과 오랜 시간의 접촉과 교감을 요하는 것으로 훨씬 지속적인 관계와 소통을 전제한다. <봉지 속 상자>의 개입 역시 즉석 만남보다는 일종의 관계성을 요구하는데, 선정된 대상의 취향을 파악하고 이에 맞도록 장을 보는 행위는 해당 인물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며, 선물을 받은 관객이 집에 돌아가 작가가 선별한 재료로 저녁을 해먹으면서 완성되는 교감이다. 그런 면에서 ≪FREE Flight≫에서 박보나의 개입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행위(praxis)’에 맞닿는다. 아렌트는 행위를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기초적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나 먹고 살기 위해 불가피한 ‘노동’과는 달리, ‘행위’는 타인과 관계 맺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류이자 네트워크다. 박보나는 제도 이면에 있던 타자들과 접속하는 행위를 통해 전시라는 범주의 배타성과 관습성을 상기시킨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결국 도구적인 서구 물질문명의 해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지속적 관계의 축적으로서 박보나의 개입은 전시라는 미술 제도의 틀과 고정관념을 헐겁게 만들려는 시도다. 그 과정에서 박보나가 던져 놓은 대상들은 일종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대가없이 제시되는 선물은 일종의 증여로서, 교환 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회로를 끊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다. 흰색에서 파랑색까지 차츰 농도를 더해가며 모노크롬 회화마냥 걸려있는 10개의 수건은 그 상징으로 돌잔치, 총장 취임식, 고교 동창회 등에서 전부 거저 얻은 것이다. 최고급 교환가치를 자랑하는 고급미술 오브제 대신 걸린 공짜 수건과 너절하고 허름한 아이템을 자랑하는 반-패션쇼는 전시의 자본주의적 속성 바깥의 대상이다. 오프닝에서 그냥 나눠주는 김밥과 도록 역시 실상 제도 밖 존재들의 노동의 결과이자 기록으로 작가가 관객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고가네 김밥의 이길희님이 만든 김밥을 함께 나눠먹음으로써 박보나는 제작자들을 넘어 관객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며, 역으로 관객은 책자를 통해 이들 물건의 생산자들과 간접적이나마 교류하는 소통의 행위를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으레 공짜려니 여기는 도록과 김밥도 범상치 않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박보나가 음지에 있던 대상들을 끌어내서 밝은 하늘로 던져 올린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이번 전시 전체가 커다란 공짜 비행(FREE Flight)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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