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그 달아나는 흔적의 빈 칸

 

 

문혜진

 

현대미술에서 개념의 무게는 얼마쯤일까. 뒤샹 이후 개념이라는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이 질문은 자체로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미술사 내내 버렸다 주웠다를 반복했을 정도로.

그런데 박보나는 이 어려운 질문을 단번에 풀어버린다. 그것도 가장 정공법으로. 순전히 제목 잘못 단 죄로 선택된 『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는 박보나의 샌드페이퍼 앞에 싹싹 지워져 한낱 가루로 화하고 37.3g이라는 물리적 수치로 환원된다. 지워진 현대미술의 의미. 개념들은 정말 사라졌는가. 지워진 책을 가만 들여다본다. 남겨진 것들--목차, 주석, 제목, 그리고 지워진 본문 자욱. '존재했음'을 알리는 이 지표들은 잠시 사라졌으나 장막 뒤에 굳건히 현존하는 현대미술, 그 개념의 유령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유령은 이미 전과 같지 않다. 지우기라는 빈 방을 통과함으로써 낯선 무엇으로 변태한 것이다.

박보나에게 '지우기'라는 수단은 개념들의 홍수에 빠진 현대미술의 무력함에 대한 인정이자 동시에 탈출구다. 지움은 비움을 가져오고, 비워짐은 새로운 의미 생성을 가져온다. 마치 야콥슨의 전이사(shifter)1처럼, 비워짐으로써 의미화작용으로 가득 채워지는 박보나의 지우기는 '지워지는 곳에서 새로운 생산을, 무기력함에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작가) 역설이다. 그런데 시간 앞에 행위로써 사라져버리는 지우기의 현존. 그것은 지움의 흔적들인 지표들이 증명한다. 그 각기 다른 지우기의 자취들이 바로 박보나의 지난 2년간의 발자국이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교환학생으로 있을 당시 제작된 <37.5''x75''>는 37.5''x75''라는 특정 공간의 먼지와 머리카락을 스카치 테이프로 매일 청소한 작업이다. 존재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부적절한 청소도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청소를 비움이 아닌 채움, 곧 현존에 대한 기록의 지표로서 전이시킨다. <갤러리 흰 벽 지우기>역시 <37.5''x75''>와 같은 맥락상에 위치한다. 전시기간동안 매일 일정시간에 정장을 입고 미술용 고무지우개로 갤러리 흰 벽을 지워나간 작가의 엄숙한 청소 행위는 되려 지저분해지는 벽 때문에 지우기의 본래 의미를 잃고, 지우기에서 더럽히기로 기의를 맞바꾸는 현대미술과 언어를 향한 한바탕 익살극이 되어버린다. 한편, 하루분의 New York Times에서 Consumption2에 해당하는 알파벳을 모두 오려버린 <Consumption>에서 박보나는 사물의 원래 기능을 지움으로써 의미 전환을 유도한다. 정보전달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제거당한 읽을 수 없는 신문은 하나의 창으로 변모하며, 그 창을 들여다본 관객은 거울에 비친 자신과 분열된 시선을 교환한다. broadcast라는 미디어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Media Light>에 이르면 더욱 확대된다. 지워버린 신문으로 TV를 가린 이 작업에서 대표적 두 매스미디어인 신문과 TV는 둘 다 지워져버린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빛나는 발광체로서의 TV 뿐.

현존과 부재의 영원한 유희로서의 박보나의 지우기는 그래서 움직이는 빈 칸(들뢰즈)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만들고 영원히 자리를 바꾸는 살아 뛰는 생명체. 개념이자 수단이며, 의미이자 행위이고, 말이자 대상인 다면의 그 무엇.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칸을 채우는 내용만이 아니라 칸 자체도 변한다는 것이리라. '지우기'라는 박보나의 빈 칸의 이름은 최근 '발견하기’라는 새 이름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최근작 <화분의 발견> 시리즈와 <남산 그리고 서울 타워>시리즈는 그 산종의 첫 씨앗이다. 개입은 보다 적게, 의미는 보다 많이. 지우기에서 자리 바꿔 늘어놓기로 옮아감으로써, 박보나는 지우기 작업에서 보여줬던 작업관 - 물리적 대상성은 유지하되, 의미론적 대상성은 뒤흔드는-을 보다 확장시킨다. 일방향적 작가적 제시에서 한 발짝 더 물러나고, 재현 방식을 한층 다변화하고, 미술 밖 세계도 함께 쳐다보면서. 그래서 더 뚫려 버린 담장 사이로 솟아난 의미들을 내쳐 풀어 놓으며.

결국 박보나는 현대미술이라는 무한한 의미의 그물망 한가운데서 잡았다 놓기의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달아나는 의미를 붙잡아 엉뚱한 얼굴로 내놓기의 이중 게임을. 쉴 새 없이 변형하는 빈 칸이라는 괴물을 타고 다니며. 드 쿠닝을 지움으로써 우글거리는 생산적 질문들을 양산한 라우센버그3처럼, 현대미술의 철학적 의미를 지워버린 박보나는 메아리처럼 영원히 되돌아오는, 그러나 결코 같지 않은 질문들을 묻고 또 묻는다. 의미란 무엇인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는 무엇인지. 박보나의 이 같은 '던짐'에 대한 유일하고도 적절한 반응, 그것은 '결코 멈추지 말 것' 하나뿐일 것이다. 고여져 굳어버리지 말 것, 안주하지 말고 흐를 것. 언제나 말랑한 몸으로. 당신이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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