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될 수 있고,
누구도 될 수 없는 X의 고백

 

 

이대범 / 미술평론가

 

우리는 꿈속에서 스핑크스가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꿈을 꾸는 것이다.
- 보르헤스, 꿈 중에서

박보나의 X, XX, X2는 전시공간이 변하고 있음에도,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전시장에는 망원경이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으며, 외부로 열려 있는 유리창이 있다. 전시장 내부에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시각적 요소가 삭제되어 있다. 유리창과 망원경의 사전적인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박보나는 관객의 시선이 전시장 외부로 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관객의 시선이 즉각적으로 외부로 뻗어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우선 시선을 유리창 표면에 머물게 한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층위에 놓인 X(X, XX, X2)의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시장 내부에 있는 관객의 시선은 유리창 표면, 혹은 유리창 저 너머의 외부, 혹은 전시장 내부로 투사되며 중층적으로 결합한다.

유리창 표면 : 반사하는
X와 X2에서 중요한 것은 익명으로 처리된 X와 "X가 해준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필자강조) 옮기는 '나'와의 관계가 기술되어 있는 유리창이 '거울'로서 제시된다는 점이다. 두 이야기의 대략적 서사는 이러하다. X와 '나'는 유리창을 경계로 내부와 외부에 놓여 있는 상이한 인물이다. "딱히 특징이 없는" X가 어느 날 '나'를 "불쑥 찾아"온다. 그리고 X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것을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기술한다. 그러기에 텍스트를 기술하는 이는 '나'이지만, 정작 그곳에는 '나'의 이야기가 없다. '나'가 유일하게 스스로 말(X의 이름)할 수 있는 순간에도 그는 주저하며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X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할 뿐이다. 그렇다면 유리창 표면의 텍스트는 X와 '나'가 동일시된 상태에서 발화된 진술인 것이다. 비록 X는 말을 하고, '나'는 (듣고) 쓰는 역할에 충실하며, 그들은 (언어적 측면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X는 자신의 말을 현현해줄 수 있는 '나'를 만났을 때만 말을 한다. '나' 앞에서는 수다스러운 X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는 말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말만 할 수 있도록 제한받고 있다. X에서 X는 주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조용하고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XX에서는 하루의 13시간을 작업만 하며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X2에서는 "미술관 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과월호 잡지나 시시한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제한된 말하기는 X2의 X와 같은 얼굴의 가나아트센터 지킴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연명하는 것처럼 보였던 X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그들이 욕망하는 것, 즉 3년 전에 왜 자신을 떠났는지에 대한 답변을 들은 후(X), 자신과 얼굴이 같은 이를 제거할 계획을 마친 후이다(X2). 일상에서는 제한된 말하기로 발화되지 못했던 그들의 욕망은 '나'를 통해 언어로 나타난다.

유리창 외부 : 관통하는
그러나 유리창은 거울이면서 거울이 아니다. 여전히 유리창의 내부와 외부는 상이하다. 뿐만 아니라 거울을 보는 자는 항상 거울 앞에 서야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도 유리창 앞에는 '나'(혹은 X)가 없다. 단지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는 흔적(언어)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제3의 인물인 관객이 등장한다. 관객은 유리창 앞에 서 있으나, 유리창은 정작 그를 비추지 않고 이미 자리를 떠난 X와 '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또한 X와 '나'는 어디로 사라진 것 일까? 자신을 비출 것이라 예상했던 유리창에 정작 자신은 없고 이미 사라진 -또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는- X와 '나'만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관객의 시선에는 텍스트로 가득한 유리창 표면 너머가 들어온다. 그곳은 X가 있는(있었던 또는 없었던) 곳이다. 관객은 망원경을 통해 너머를 눈앞에 현전시키며 X를 찾는다.

한편, <XX>에는 '나'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나'는 스스로 '발견'(또는 발견하리라 희망하는 것)한 것을 통해 X를 기술한다. XX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업은 대칭적이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건물(빅바스 / 벤핌락)이 있으며 그곳에는 동일인물인 X를 소개하는 글이 각각 쓰여 있다. '나'가 X라고 주장하는 이는 맞은 편 건물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유리창에 쓰인 텍스트를 읽고 있으며, 망원경을 들고 있으며, 맞은편 건물('나'가 있는 건물)을 보고 있다. 두 건물의 관객은 하나의 이야기로 묘사된 X를 찾지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유사한 행위를 하는 인물이다. 결국 X를 찾는 행위는 '증발'(또는 '실종')된다.

XX의 대칭 구조는 마치 거울 앞에 놓인 X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는 자신의 완벽한 복제물인가. 라캉이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아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오인(meconnaissance)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이미지는 실제의 자기와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고, 그러므로 거울 속 자기 이미지는 타자로서 존재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이미지와 실제 사이에는 균열 혹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목에서 뒤의 X는 끊임없이 앞의 X와 합일하려 하지만, 앞의 X는 끊임없이 틈을 두고 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장에 놓인 망원경은 저 먼 곳의 X를 자신의 눈앞에 현전시켜 합일하려는 도구이다. 그러나 그들과 아무리 가까워진다고 해도 합일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망원경 크기만큼의 틈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 내부 : 거울(유리창)은 없다
'XX'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면, 'X2'는 서로 상이함을 나타낸다. 이는 X2가 XX에서 보여준 숙명적인 자기동일성의 실패를 상정함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게 두 개 존재할 때 가장 끔찍한 게 무엇일 것 같나요?"라는 질문은 거울 앞에서 '거울은 없다'라고 말하는 도발적 선언으로 들린다. X와 XX에서 전시장 내부는 관객들이 외부를 보기 위한 공간이었다. X와 '나'는 유리창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X2에는 어디론가 사라진 X인지 아닌지 모를 인물(지킴이)이 전시장 구석에 앉아 있다. 그러기에 관객은 전면에 유리창이 있고, 망원경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유리청 너머를 보기 전에 구석에 숨죽이고 앉아 있는 지킴이를 보게 될 것이다. 즉, 거울(유리창)에 등을 돌리고 거울의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다.

X2의 X는 낯선 남자에게 자신과 같은 얼굴인 여자(가나아트센터의 지킴이)를 죽여 줄 것을 요구한다. "꼭 죽여주셔야 해요. 반드시 얼굴 쪽을 공격해 주세요. 북북 으깨주세요. 얼굴이 남지 않도록.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도록" 그리고 며칠 후 그도, 그와 같은 얼굴을 한 이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전시장 내부에 있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권총을 들고 3년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를 찾아간 X인가? 아직 숨죽이고 있는 유망한 아티스트 X인가? 말없이 자신의 할 일만을 하던 토탈미술관 지킴이인가? 지루함이 가득 묻어나는 가나아트센터 지킴이인가? X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인가? X를 애타게 찾던 관객인가? 맞은 편 건물에 망원경을 들고 X를 찾던 그 인가? 아니면 당신인가? 그는 그중 하나 일 수 있으며, 그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아티클 인덱스